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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이 난중일기 에 ‘천행(天幸)’이라고 한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연구결과 그 단어 속에는 많은 예측불허의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였다는 숨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전쟁의 근본원리인 우승열패(優勝劣敗)개념이 무너진 전투가 명량해전이다. 본고에서는 10배 이하의 열세한 전투력으로 전장의 불확실성과 마찰을 극복하고승리한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출해 보고자 하였다.그리고 임무완수를 저해하는많은 변수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분석하기 위해 임무변수(METT-TC)를 분석의 틀로 활용하였다. 분석결과 명량해전의 승리요인은,첫째,이순신의 종합적인 상황판단에 의한가용시간 창출과 내실 있는 전투준비,둘째,탐망활동으로 일본 수군의 의도를간파하여 사전에 대책 강구,셋째,승리할 수 있는 장소(명량)를 선택하여 그 장소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여 격멸시켰는데,일본 수군의 결정적인 전술적 과오가있었다.넷째,이순신의 빛나는 전장리더십으로,솔선하여 독전(獨戰)함으로써 부하들의 공포감을 불식시켜 必死則生의 자세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였으며,엄정한 군기와 군령을 유지하여 명령을 이행하게 함으로써 전장 상황에 최적화된 전투수행방법(총통사격 → 화살공격 → 2∼3척의 함선이 합세한 협격)을 구사할수 있었고,다섯째,조류 흐름과 북풍이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본 연구는 명량해전사를 군사적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분석함으로써군사과학적으로 승리요인을 도출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주제어:명량해전,천행,임무변수(METT-TC),불확실성,마찰,승리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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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기록에...명량해전은 승리을 장담할수없었던...천행,이라

말하였는데...모든병사들이 죽기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하였는데...

사호공, 오익창 의글...사호집에서...고증이 입증된...정조시대,재상..체재공,글.번암집.

홍문관대제학, 서명응...등 6명의 유명인들이 명량해전에 대하여..글을 남겼다.

이글들을 상세하게 분석하여보면,  승리을 장담할수없는 빈약한 전쟁준비상황에서..

죽기을각오한 처절한 상황에서.. 각자, 무기,을가진 피난선, 일천척의 지원..

조선수군, 이순신 함대와 함께, 죽기을 각오하고.. 응원하고, 지원하는 피난민들의 힘이

명량해전의 천행의 승리에...어떻게, 얼마나, 큰힘이되었는지?..상상할수있다.

더욱이, 명량해전에는, 간이식,거북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장군의 명으로, 긴급하게 만든 간이 거북선을. 사호공 오익창이 만들었다고

여러문헌에 기록되어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호공 오익창의 공과는, 명량해전 승리에, 큰공과을 남긴것이다.

사호집에...유명인들의 문집에 기록을남기게 된것도..

이런공과을 인정했기 때문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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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 명에 의하여,긴급하게 만들어진 거북선이 있었다는증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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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에서  거북선이 있었다는 근거로써...

사호집, 에   조선시대, 유명한 6인,의 글이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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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조카...이분이 기록한...명량해전, 직전에


이순신장군이...판옥선을 거북선,처럼...개조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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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집에 보면...조선시대, 유명인 6인..의기록에

사호공,오익창이...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이 컸다...기록됨.

이기록을..이순신장군,조카..이분의 글..과 일치시켜보면...

명량해전직전..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 대비하여..

작전상..긴급하게..거북선,역활을 할수있는배가 필요하여..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하도록..명하였을때..

이 거북선. 개조작업을 한...사람이  사호공, 오익창..이였다.

라고 본다면..사호집의 글이 사실이고..고증에 일치한다고 해석할수있다.

결론적으로본다면.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명,에의하여...긴급하게 창조하여 만든

간이식, 거북선이 있었다는것이..증명이 되는것이다.

이,명량해전에 투입된..거북선은..사호공,오익창이 창조하여 만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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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사호집...거북선 창조글 보기..6인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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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거북선의 등장?[편집]

철쇄설에 비해 빈도는 적지만 가끔 등장하는 떡밥으로,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결전병기 수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명량 해전이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거북선이 등장했다는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철쇄설과 마찬가지로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거북선 자체가 판옥선을 보조하는 함선으로 중요성이 낮은데다,[72] 이전부터 건조한 거북선들은 모두 칠천량 해전 당시 손실하였고,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거북선이 있었다고 해도 문제인데, 이순신 장군의 전술상 거북선은 원거리 지원 세력이 든든하게 뒷받치는 가정하에 맨 앞에서 날뛰는 돌격선 용도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20척도 안되는 전 병력에서 거북선 전술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어영담, 정운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 중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이순신의 행적을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선 회령포에서 이순신이 잔여 함대를 인수한 뒤, 장수들에게 전투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선 실제로 판옥선 중 1척 ~ 2척을 거북선으로 개조했다는 설과 해당 내용 자체가 후대에 가필[73]유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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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서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호집에 있는글..증거기록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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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

  2).           而至於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3).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4).          無用軒后之舊制, 始創, 給餽多年


  5).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6).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7).          多有裨益. 而至於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서명응 기록......사호집에기록된 증거자료.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숭정대부 행호조판서 겸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손좌빈객 서명응(徐命膺) 짓다.

본 전()은 서명응의 문집 보만재집(保晩齋集) 9 잡저(雜著)에도 있는데 여기에는 오익창전(吳益昌傳)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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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統制使舜臣 率舟師 禦倭奴於閑山島 當元均敗衂之餘 收合煨燼戰艦僅十有二 而嶺湖士大夫浮海逃者千餘艘 欲散而之諸島 公奮曰賊兵衆 統制之兵寡 其敗可而待也 統制敗則我之藩籬撤矣 雖欲各保孤島 得乎 毋寧幷力合勢 爲統制聲援 有可以苟全之路 藉令俱死 亦有爲國效忠之名也 衆曰善 遂爲文布告諸舡 於是千艘揚帆 俱列統制舡後 聯成水寨 陣勢甚壯 公乘輕舠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方秋風高 海氣凛凛 徹人肌骨 統制軍皆被褐呼寒 糧且盡 公以忠義激諸船人 各出襦衣米斛 滿載一船 躬卛至統制軍 軍皆感悅



좌승지  이화진 기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이화진(華鎭)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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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卽發文通告諸船, 諸船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諸舡, 布陣於戰艦之後, 以助其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홍중현 기록.

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洪重鉉撰.

통훈대부 전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홍중현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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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卽發文, 通告諸舡, 諸舡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諸舡, 布陳於戰舡之後, 以助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畫, 多有裨益. 而至於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정유주.   주세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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况且丁酉之, 一國魚肉, 八路鳥竄, 統制舜臣, 摠舟師於閑山島, 禦强寇於鏖戰. 而時丁元均僨績之餘, 只有戰艦十餘艘. 兵孤勢弱, 聲援且絶, 公於是乎激勵孤忠, 倡發大義, 通告于避諸舡士夫曰, 今日國家之存亡, 在此統制之勝敗. 各使資粮弓矢, 排列於戰舡之後, 以助其舟師之聲勢, 則賊無輕視於統制之兵, 而統制之兵, 孤矣. 假令統制不利, 則諸島避, 獨免魚肉乎? 生而苟活, 如死



 


云爾. 則諸船士夫, 一時相應, 舡千餘艘, 果爲聲援. 公時乘片舸 往來統制之營中, 征謨師畫, 日夜講論, 至若龜舡, 創制指揮. 旋蓬而絮衾漬水, 掛舡避丸, 東苽救渴, 櫓卒汔濟. 統制至誠倚重, 歎服才德, 乃曰, 若夫成功, 則皆是吳上舍之力也. 書庸識哉, 以爲他日讓功之地, 而惜乎, 佑我統制徑殞, 事未上徹, 公亦自晦.



신선부  기록

不煩子房之前籌, 默運心算, 無用軒后之舊制, 始創, 給餽多年, 旣致華人之加敬.


장자방(張子房, 유방의 책사 장량)같이 셈대를 앞세우는 번거로움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였고,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옛 제도232)도 필요없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군량을 배급함이 정확하여 명나라 군이 더욱 공경하였네.






서명응 기록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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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統制使舜臣 率舟師 禦倭奴於閑山島 當元均敗衂之餘 收合煨燼戰艦僅十有二 而嶺湖士大夫浮海逃者千餘艘 欲散而之諸島 公奮曰賊兵衆 統制之兵寡 其敗可而待也 統制敗則我之藩籬撤矣 雖欲各保孤島 得乎 毋寧幷力合勢 爲統制聲援 有可以苟全之路 藉令俱死 亦有爲國效忠之名也 衆曰善 遂爲文布告諸舡 於是千艘揚帆 俱列統制舡後 聯成水寨 陣勢甚壯 公乘輕舠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方秋風高 海氣凛凛 徹人肌骨 統制軍皆被褐呼寒 糧且盡 公以忠義激諸船人 各出襦衣米斛 滿載一船 躬卛至統制軍 軍皆感悅


모두가 좋다고 응하였다. 마침내 글을 지어 여러 선박에 포고하자, 이에 천여 척의 배들이 출항하여 모두 통제사의 배 뒤에 늘어서서 물위의 성곽 모양을 연이어 이루니 진영의 형세가 매우 웅장했다. 공이 날렵한 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군사의 일들을 계획하니,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이화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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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卽發文通告諸船, 諸船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諸舡, 布陣於戰艦之後, 以助其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홍중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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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卽發文, 通告諸舡, 諸舡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諸舡, 布陳於戰舡之後, 以助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畫, 多有裨益. 而至於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정유주.   주세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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况且丁酉之, 一國魚肉, 八路鳥竄, 統制舜臣, 摠舟師於閑山島, 禦强寇於鏖戰. 而時丁元均僨績之餘, 只有戰艦十餘艘. 兵孤勢弱, 聲援且絶, 公於是乎激勵孤忠, 倡發大義, 通告于避諸舡士夫曰, 今日國家之存亡, 在此統制之勝敗. 各使資粮弓矢, 排列於戰舡之後, 以助其舟師之聲勢, 則賊無輕視於統制之兵, 而統制之兵, 孤矣. 假令統制不利, 則諸島避, 獨免魚肉乎? 生而苟活, 如死


 


云爾. 則諸船士夫, 一時相應, 舡千餘艘, 果爲聲援. 公時乘片舸 往來統制之營中, 征謨師畫, 日夜講論, 至若龜舡, 創制指揮. 旋蓬而絮衾漬水, 掛舡避丸, 東苽救渴, 櫓卒汔濟. 統制至誠倚重, 歎服才德, 乃曰, 若夫成功, 則皆是吳上舍之力也. 書庸識哉, 以爲他日讓功之地, 而惜乎, 佑我統制徑殞, 事未上徹, 公亦自晦. 

만약 통제사의 군대가 불리하다면 여러 섬으로 피난한들 홀로 어육이 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서 구차히 사는 것은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여러 선박에 사족들이 일시에 상응하여 피란선 천여 척이 과감히 성원하였습니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군영을 왕래하며 전쟁하고 군대를 부릴 계책을 밤낮으로 논하였고, 거북선에 있어서도 만드는 과정을 지휘하였습니다.

 

신선부  기록

不煩子房之前籌, 默運心算, 無用軒后之舊制, 始創, 給餽多年, 旣致華人之加敬.


장자방(張子房, 유방의 책사 장량)같이 셈대를 앞세우는 번거로움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였고,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옛 제도232)도 필요없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군량을 배급함이 정확하여 명나라 군이 더욱 공경하였네.




신선부(申善溥)  신선부. 인물.

1667년(현종 8)∼1744년(영조 20). 본관은 고령(高靈)천여(天如)

우참찬 신공제(申公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행 통례원인의(行通禮院引儀) 신호(申滈)이다. 당시(唐詩)와 진(晉) 나라 시대 필법에 능하고 그림도 신묘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국초 이래 삼백년 동안에 나오기 드문 인재였으나, 20세 이후에는 붓을 잡지 않아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또한 손(孫)오(吳)의 책 병법서를 좋아하여 공수영진(攻守營陣)‧기정합산(奇正合散)‧천시음양(天時陰陽)의 법에 대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