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제 2차 당포. 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을 아뢰는 계본]
일 자   만력 20년(1592) 6월 14일
삼가 적을 쳐서 사로잡은 일을 아룁니다.

전일 경상도 옥포 등지에서 왜선 40여척을 불살라 없앤 상황은 이미 장계로 보고 한 바입니다.

부산의 적들이 서로 잇따르며 떼를 지어 점점 거제도 서쪽으로 침범하여 연해안 여러 고을을 불지르고 노략질하여 긴요한 것을 갖고 가는 것이 계속되고 있으니, 분하고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본도에 소속된 수군을 징집하고 한편으로 본도 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력하여 적을 쳐부술 예정이니 빨리 달려옴이 좋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면서 <물길이 멀고 풍세의 형편도 예측하기 어려우니 6월 3일까지 본영 앞 바다로 일제히 모여 구원하러 출전하자.>하였습니다.

그런데 5월 27일 도착한 경상우수사 원 균위 공문에, 『적선 10여척이 벌써 사천. 곤양 등지에 육박하였기로 수사는 배들을 남해땅 노량으로 이동하였다.

』하였으므로 만일 3일 모이기로 약속한 날까지 기다려서 출발한다면 그 사이에 적이 뒤따르는 선단을 끌어 들여 적의 형세를 키워 줄 것이 염려되어 신의 군관 전 만호 윤사공을 유진장으로 임명하고,수군 조방장 정결에게는 자도의 각 진포에 지휘할 사람이 없으므로 <흥양현에 머물러서 책략에 호응하여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29일 신은 홀로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우후 이 몽구와 함께 날짜를 앞당겨 출전하였으며, 이억기에게는 사유를 적은 공문을 내었습니다.

이어 곧바로 노량 해상에 도착한 즉, 원균은 다만 3척의 전선을 이끌고 하동 선창에 옮겨 있다가 신의 함대를 보고 노를 재촉하여 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적의 행방을 상세히 묻고 있을 때, 멀지 않은 해상에서 왜선 한 척이 곤양으로부터 나와 숨어서 사천으로 향하여 기슭을 타고 배를 저어가는지라, 선봉에 위치한 여러 장수들이 노를 빨리 저어 추격하여 전부장 방답 첨사 이 순신(李純信)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그 배를 추포하자, 왜적들은 상륙해 버렸으므로 배만을 깨뜨리고 불살랐습니다.

그 후 사천 선창을 라보니 산이 구불구불 둘려 7,8리나 뻗혔는데, 지세가 높고 험한 곳에 무려 400여 명의 왜적들이 장사진으로 진을 치고 붉고 흰 깃발들을 난잡하게 꽂아 사람들의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으며, 진중의 가장 높은 산 꼭대기에 별도로 장막을 치고 분주하게 왕래하는데, 무슨 작전 지휘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왜선들의 상황은 누각과 같은 것 12척이 언덕 아래 열박하였는데, 진을 치고 있던 왜인들이 굽어보며 칼을 휘두르며 우리를 깔보는 듯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배들이 그 밑으로 일제히 돌진하여 활을 쏘려고 하였으나 화살이 미치지 못하겠고, 또 그 배들을 분멸(焚滅) 하려고 하였으나, 벌써 썰물이 되어 판옥선과 같은 큰 배는 용이하게 돌진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적들은 높은 곳이며, 우리편은 낮은 곳으로서 지세가 불리하고 날도 저물어 가므로 신은 여러 장수들에게,『저 적들이 매우 교만한 태도를 갖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만약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면 적은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와 상전(相戰)하려고 할 것이니,이때 우리는 적을 한 바다로 끌어내어 힘을 합쳐 격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라고 단단히 미리 결정해 두고 배를 돌려 1리도 못나오자, 왜적 200여명이 진친 곳으로부터 내려와서 반은 배를 지키고 반남짓은 언덕 아래로 모여 총을 쏘며 좋아서 날뛰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싸우지 아니하면 도리어 약한 것 같이 보일 뿐 아니라 마침 조수가 밀려들어 점점 배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일찌기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지 현.황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하자, 산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곳의 적들도 철환을 비오듯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신은 더욱더 분하여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바로 그 배를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일시에 운집하여 철환과 장편전. 피령전. 화전 및 천.지자 총통 등을 비바람같이 발사 하면서 저마다 힘을 다함에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왜적들은 부상을 당하여 엎어지는 자와 부축하여 달아나는 자의 수을 알 수 없었으며, 높은 언덕으로 도망쳐 진치고서는 감히 나와 싸울 생각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위장 순천 부사 권준. 중부장 광양 현감 어 영담. 전부장 방답 점사 이 순신. 후부장 홍양 현감 배 흥립. 좌척후장 녹도 만호 정 운.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 완. 좌별도장 우후이 몽구. 우별도장 여도 권관 김 인영. 한후장이며 신의 군관인 전 전 군관 고 안책. 급제 송 성.참퇴장 전 첨사 이 응화 등이 번갈아 드나들면서 왜선 전부를 당파 분멸하였으며, 김 완은 우리 나라 소녀 한명을 찾아내었고, 이 응화는 왜인 한명의 목을 베었는데, 왜인들이 멀리서서 바라보며 부르짖고 발을 구르며 대성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여러 배에서 용사를 뽑아 진격케 하여 목을 베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산위의 덤풀과 나무들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날도 저물었기 때문에 도리어 피해가 있을 것이 두려워 적을 수색하여 목베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짐짓 소선 몇 척을 남겨두고 끌어내어 섬포할 계획을 세우고 밤을 이용하여 배를 돌려 사천땅 모자랑포로 옮겨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접전할 때, 적의 철환이 신의 왼편 어깨를 맞히고 등을 뚫었으나, 중상에 이르지 않았으며, 신의 군관인 봉사 나 대용도 철환을 맞았고, 전 봉사 이 설도 화살에 맞았으나 모두 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6월 1일 새벽에는 경상우수사 원균이 신에게 말하기를,『어제 접전할 때, 짐짓 남겨 둔 적선 2척이 도망쳤는지를 알아 볼 겸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의 목을 베겠노라.』 하였는데, 처음에 원 균은 패군한 뒤 군사없는 장수로써 작전을 지휘할 수 없었으므로 전하는 곳마다 화살이나 철환에 맞은 왜인을 찾아내어 머리 베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진시(辰時)에 그곳을 들려 와서 말하는 내용에,『왜적들은 육지를 경유하여 멀리 도망하였기 때문에 남겨 두었던 배를 불태웠는데, 죽은 왜놈을 수색하여 목을 벤 것이 3급이며, 그 나머지는 숲이 무성하여 끝까지 탐색할수 없었다.

』 하였으므로 정오에 배를 띄워 고성땅 사량 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쉬게 하고 위로 하며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2일 진시(辰時)에 <적선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시(巳時) 쯤 바로 그곳에 도착하니 무려 300여명의 왜적들이 반은 성안에 들어가서 분탕하고 또 많은 수의 왜적이 성 밖의 험한 곳에 의거하여 함께 철환을 쏘는 것이었습니다.

왜선은 크기가 판옥선과 같은 것 9척과 중.소선을 합한 것 12척이 선창에 분박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 한 대선 위에는 높이가 3.4장이나 될 듯한 높은 층루가 우뚝 솟았고, 밖으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두르고 휘장의 사면에는 「황」자를 크게 썼으며, 그 속에 왜장이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조금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層樓船) 밑을 들이 받으면서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치쏘게 하고 또 천.지자 총통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리자, 뒤따르고 있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교발하였는데, 중위장 권 준이 돌진하여 왜장이라는 놈을 쏘아 맞추자, 쿵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므로 사도 첨사 김 완과 군관 홍양 보인(保人) 진 무성이 그 왜장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적도들이 겁내어 도망치는 중에 철환과 화살을 맞은 놈들이 여기 저기에 넘어지는데, 머리 6급을 베고 그 배들이 모조리 (21척) 불살라 버린 뒤에, 여러 전선의 용사들이 그대로 상륙하여 끝까지 쫒아서 수색하여 적의 목을 베려하던 때에, 『왜대선 20여척이 소선을 많이 거느리고 거제도로부터 내항하고 있다.

』라는 탐망선의 급보를 접하였으므로 당포는 지형이 좁아서 교전하기에 합당치 않아서 바다 밖에서 요격할 예정으로 노를 재촉하여 바깥바다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적선들이 5리쯤 되는 거리에서 신들의 함대를 바라보고 정신없이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전선이 뒤쫒아 갔으나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접전할 수 없어 진주땅 창신도에서 배들을 멈추고 밤을 지냈습니다.

그날 당포에서 접전할 때, 우후이 몽구가 왜장선을 수색하여 찾아낸 금부채 한자루를 신에게 보냈는데, 그 부채의 한쪽 중앙에 쓰여 있기를「6월 8일 수길」라 서명하였고, 오른편에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는 다섯 자를 썼고,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流求守殿)」라는 여섯 자를 썼으며, 이를 옷칠한 갑 속에 넣어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 필시 <수길>이가 <축전수>에게 부신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비포 권관 이 영남이 그 왜장선에서 울산 사삿집 계집종 억대와 거제소녀 모리 등을 산채로 사로잡았는데, 신이 직접 문초한바, 억대의 답하는 내용에,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15일전 왜적에게 포로되어 왜장에게 시집가서 늘 한곳에 있었습니다.

그 왜장은 키가 보통 사람보다 크고 기력이 강장하였으며, 나이는 30세가량 되었습니다.

낮에는 누른 비단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서는 배위의 층루에 높이 앉아 있었고, 밤에는 방에 들어와서 자는데, 이부자리와 베개가 모두 극히 사치했습니다.

각 배의 왜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와서 보고 머리를 숙여 명령을 듣는데, 명령을 위반하기만 하면 용서없이 목을 베었습니다.

때로는 술을 가져와 바치고서는 웃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었으나, 오랑캐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울산. 동래. 전라도 등의 말은 우리나라 말과 같았습니다.

그날 접전할 때, 왜장이 앉아있는 층루에 화살과 철환이 퍼부어져서 처음엔 이마를 맞았지만 안색이 태연하였는데, 곧 화살이 가슴의 한 복판을 관통하자, 제정신을 못차리고 떨어졌습니다.

』 라고 진술하였는바, 이번에 목베인 왜장은 반드시 「우시축전수」일 것입니다.

3일에는 새벽에 배를 띄워 추도로 향하면서 그 근처의 섬들을 협공하며 수색했으나, 적의 자취가 없을 뿐 아니라 날이 저물어 가므로 고성땅 고둔포에서 밤을지냈습니다.

4일 이른 아침에는 당포 앞바다로 옮겨 진을 치고, 소선으로 하여금 적선을 탐망하게 하였는데 , 사시(巳時)쯤 당포에 사는 토병인 강 탁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산으로 피난갔다가 멀리서 신들을 바라보고 매우 기쁜 모양으로 와서 말하기를, 『2일 당포에서 접전이 있은 뒤에 왜인들이 많이 죽은 그들의 머리를 베어 한곳에 모아서 불사르고, 곧 육지로 향하면서 길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도 살해할 생각도 못하고 통곡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 날 당포 바깥 바다에서 쫓겨간 왜선은 오늘 거제로 향하였습니다.

』 하였으므로 다시 여러 장수들과 적선을 찾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하고 곧 적이 있는 곳을 향하여 배를 띄우려고 할 때에, 본도 우수사 이 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항상 외롭고 약한 군세를 염려한 여러 전선의 장수와 군사들이 계속된 전투로 피곤하게 될 무렵에 응원군을 맞이하게 되자, 좋아서 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은 이 억기와 함께 적을 쳐부술 방책을 토의하였으나, 곧 날이 저물기로 함께 배를 띄워 거제와 고성의 두 경계인 착량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5일은 아침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가 늦게야 걷히었는데, 거제로 도망쳐서 숨어 있느 적을 토멸하려고 돛을 올려 출전할 무렵에 거제에 사는 귀화인 김모 등 7,8명이 조그마한 배에 같이 타고 매우 기뻐하는 모양으로 와서 말하기를, 『당포에서 쫒기 왜선이 거제를 지나 고성땅 당항포로 옮겨갔습니다.

』 하였으므로 급히 당항포 앞 바다에 이르러 남으로 진해쪽을 바라보니 성 바깥 몇 리쯤 되는 들판에 무장한 군사 1000여명이 깃발을 세우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탐문해 본 결과 함안 군수 유숭인이 기병 1100명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이곳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곧 당항포 바다 어귀의 형세를 물어보니 <거리는 10여리나 되고 넓어서 배가 들어갈만 하다.>하므로 먼저 몇 척의 전선을 시켜서, 『지리를 조사해 오되 만약 적이 추격해오면 짐짓 물러나 적을 끌어 내도록 하라.』 라고 엄하게 지시하여 보내고 신들의 함대는 몰래 숨어 있다가 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포구로 들여보냈던 전선이 바다 어귀로 되돌아 나오면서 신기전을 쏘아 변을 알리며<빨리 들어오라.>하였으므로 전선 4척을 바다 어귀에 머물러 복병하도록 지시한 뒤에 노를 재촉하여 들어갔습니다.

양편 산기슭이 강을 끼고 20여리 이며, 그사이의 지형이 그리 좁지 않아서 싸울 수 있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전선이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일제히 들어 가면서 선수와 선미를 서로 이어 소소강 서쪽 기슭에 이르자, 검은 칠을 한 왜선이 크기가 판옥선과 같은 것 9척과 중선 4척, 소선 13척이 기슭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배는 뱃머리에 따로 판자로 된 3층 누각을 만들어 세웠고, 벽에는 단청을 칠한 것이 마치 불전과 같았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우고 누각 아래는 검게 물들인 비단 휘장을 드리웠고, 그 휘장에는 흰 꽃무늬를 크게 그렸는데, 휘장 안에 왜인들이 수없이 죽벌려 서고 있었습니다.

또 왜대선 4척이 포구 안쪽으로부터 나와서 한곳에 모이는데, 모두 검은 깃발을 꽂았고 기마다 흰 글씨로 「남무묘법연화경」이라는 일곱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신들의 위세를 본 왜적은 철환을 싸라기 눈이나 우박이 퍼붓듯 마구 쏘는데, 여러 전선이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케 하여 천.지자 총통을 쏘아 적의 대선을 꿰뚫게 하고, 여러 전선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총통과 전환을 우뢰처럼 쏘면서 한참동안 접전하여 우리의 위무를 더욱 떨치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허망한 생각에 만약 저 적들이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배를 버리고 상륙하면 모조리 섬멸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우리들이 짐짓 포위한 진형을 해체하고 퇴군할 것을 보이면 적들이 필시 그 틈을 타서 배를 옮길 것이니 그때 좌우에서 추격하면 거의 섬멸할 수 있으리라.』 라고 전령한 뒤에 퇴군하여 한쪽을 개방하자, 층각선이 과연 개방된 수로를 따라 나오는데, 검은색 돛을 둘씩이나 달았으며, 다른 배들은 날개처럼 벌려 층각선을 옹위하며 바다로 노를 재촉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의 여러 전선은 4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격을 가하고, 돌격장이 탄 거북선이 또 층각선 밑으로 달려가서 총통을 치솟아 층각선을 깨뜨리고, 여러 전선이 또 화전으로 그 비단 장막과 돛배를 쏘아 맞혔습니다.

그러자, 맹렬한 불길이 일어나고 층각 위에 않았던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다른 왜선 4척은 이 창황한 틈을 타서 돛을 달고 북쪽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신과 이억기 등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패를 갈라서 접전하며, 또 모조리 포위하자, 적선중의 허다한 적도들은 혹은 물에 빠지기 바쁘고 혹은 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혹은 산으로 올라 북쪽으로 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사들은 창 칼 활 화살 등을 가지고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해서 추격하여 머리 43급을 베고 왜선 전부를 불살라 버린 뒤에, 짐짓 배 한 척, 남겨둔 채 왜적들의 돌아갈 길을 개방해 두었으나, 이미 황혼이 짙어 어둑어둑하여 육상에 오른 왜적은 다 사로잡지 못하고, 이 억기와 함께 어둠을 타서 그 바다 어귀로 나와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6일 새벽에 방답 첨사 이 순신(李純信)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이 필시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녘에 몰래 나올 것이라>하여 그가 통솔하는 전선을 거느리고 바다 어귀로 가서 적들이 나오는 것을 살피고 있다가 전부를 포획하고 급히 보고한 내용에, 『오늘 새벽에 당항포 바다 어귀로 배를 옮겨서 잠깐 있는 동안 과연 왜선 1척이 바다 어귀로 나오는 것이므로 첨사가 불의에 돌격하였습니다.

1척에 타고 있는 왜적들은 거의 100여명이었는데, 우리편 배에서 먼저 지자 및 현자 총통을 쏘는 한편 장편전. 철환. 질려포. 대발화 등을 연달아 쏘고 던질 즈음에 왜적들은 마음이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등지둥 도망하려 하였으므로 요구금을 이용하여 바다 가운데로 끌어 내자, 반이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약 24.25세 되는 왜장은 용 가 건위하며, 화려한 군복을 입은 채 칼을 집고 홀로 서서 남은 부하 8명과 함께 지휘하고 항전하면서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첨사가 그 칼을 집고 있는 자를 힘을 다하여 활을 쏘아 맞히자, 화살을 10여대가 맞고서야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몹시 울며 물에 떨어졌으므로 곧 목을 베이게 하고, 다른 8명은 군관 김 성옥등이 합력하여 쏘고 목을 베었습니다.

그날 진시(辰時)에 적선을 불사르자,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 현령 기효근 등은 그곳으로 뒤쫒아 와서 물에 빠져 죽은 왜적을 골고루 찾아내어 목을 베인 것이 50여급에 이르도록 많았습니다.

왜선의 맨 앞쪽에는 별도로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양방을 만들었는데, 방 안의 장막이 모두 극히 화려하였으며, 곁에 있는 작은 괘 안에 문서를 가득 넣어 두었기에 집어보니, 왜인 3040여명의 「분군기」였습니다.

자기 이름아래 서명하고 피를 발라둔 것이 필시 삽혈하여서 서로 맹세한 문서인 듯 합니다.

그 분군 건기 9축을 비롯하여 갑옷.투구.창.칼.활.총통.범가죽으로 된 말안장 등의 물건을 올려 보냅니다.

』 하였으므로 신이 그 <분군건기>를 살펴보니, 서명하고 피를 바른 흔적이 과연 보고된 바와 같았는데, 그들의 흉악한 꼴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왜의 머리 6급중에서 왜장의 머리는 이순신(李純信)이 별도로 표식하여 올려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왜인들의 깃발에 물들인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전일 옥포는 붉은 깃발이었고, 이번의 사천은 흰 깃발이고, 당포는 누른 깃발이며, 당항포는 검은 깃발인바, 그원인을 생각해보면 필시 그들의 부대를 분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피를 발라 맹세한 글이 또 이와 일치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우리를 깔보고 침범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군병을 준비한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6일)은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어 바닷길을 분간하기 어려워서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저녁 무렵에 고성땅 마을간장(?乙干場)으로 옮겨서 밤을 지냈습니다.

7일 이른 아침에 배를 띄워 웅천땅 증도 바다 가운데 이르러 진을 쳤는데, 천성.가덕에서 적의 종적을 정탐하던 탐망 선장 진무 이전과 토병 오수 등이 왜인의 머리 2급을 베고 사시쯤 급히 돌아와서 말하기를, 『가덕 바다 위에서 왜인 3명이 한 척에 타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북쪽으로 도망하므로 힘을 다해서 추격하여 다 쏘아 죽이고 머리 3급을 베었습니다 그중에 1급은 경상우수사의 군관으로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위력으로 강탈해 갔습니다.

』 하였으므로 각별히 술을 먹여 곧 천성 등지로 돌려보냈습니다.

오시(午時)쯤 영들포 앞바다에 이르니, 왜대선 5척과 중선 2척이 율포로부터 나와 부산을 향하여 도망치고 있기에 여러 전선이 역풍을 따라 로(櫓)를 재촉하여 서로 바라보기를 5리쯤 되는 율포 근해까지 추격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배 안의 짐짝을 물속으로 던지고 있었으므로 우후 이몽구가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 잡아서 머리 7급을 베고 또 1척을욱지로 끌로 나와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사도 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온전히 사로잡아서 머리 20급을 베고, 녹도 만호 정운은 왜대선 1척을 온전히 사로잡아서 머리 9급을 베었고, 광양 현감 어영담과 가리포 첨사 구사직은 합력하여 왜대선 1척이 뭍으로 내릴 때 추포하여 불사르고, 구사직은 머리 2급을 베고, 여도 권관 김인영은 머리 1급을 베고,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소선을 타고 돌입하여 뒤쫒아 쏘아서 머리 2급을 베고, 그 나머지 빈배 1척은 모두 합력하여 바다 가운데서 불살랐습니다.

왜인들은 혹은 목을 짤리고 혹은 익사하여 섬멸되었습니다.

여러 전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마음이 상쾌해여 가덕.천성으로 향하다가 좌도의 몰운대에 이르러 전선을 두 편으로 나누어 협공하며 수색을 하였으나, 적도들은 배를 끌고 멀리 도망하고 아무런 흔적도 없었으므로 초경(오후 8시쯤) 거제땅 온천량의 송진포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습니다.

8일에 창원땅 마산포,안골포, 제포,웅천 등지로 적의 종적을 알기 위한 탐견(망)선을 정해보내고,창원땅 중도와 남포로 이동하여 진을 쳤는데 저녁때, 위의 탐망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어느 곳에도 적의 종적이 없다.>하였으므로 송진포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습니다.

9일 이른 아침에 배를 띄워 웅천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작은 배를 가덕.천성.안골포등지로 나누어 보내어 적의 종적을 다시금 탐색케 하였으나 어느 곳에도 적의 그리자가 없었으므로 당포에 이르러 밤을 지냈습니다.

10일에 미조항 앞 바다에 이르러 우수사 이억기 및 원균 등과 진을 파하고 각각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덕에서 수색하던 날, 그래도 부산 등지로 향하여 왜적들의 종자를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연일 큰적을 만나 바다 위를 전전하면서 싸우느라고 군량이 벌써 떨어지고 군사들도 매우 시달렸고, 전상자도 또한 많았으므로 우리들의 피로한 세력으로써 편안히 숨어 있는 적과 대적함은 실로 병가의 좋은 방책이 아닐 것이며, 하물며 양산강의 지세가 매우 좁아서 겨우 한척의 배를 수용할 수 있는데, 적선이 연일 머물러서 이미 험고한 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어서 우리들이 싸우려고 하면 적이 출전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들이 물러나려고 하면 도리어 약함을 보이게 될 것이므로 설령 부산으로 향한다 하더라도 양산의 적들이 서로 호응하여 뒤를 둘러쌀 것이니, 타도의 군사로써 깊이 들어가서 앞과 뒤로 적을 맞는다는 것은 만전을 기한 방책이 아닐뿐 아니라 보도(전라도)병사의 공문내용에,『서울을 침범한 흉악한 무리들이 조운선을 빼앗아 타고 서강을 거쳐 내려온다,』 하였습니다, 조운선을 빼앗아 탄다는 것은 결코 그럴리가 없겠습니다만 뜻밖의 사변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신은 이 억기와 상의하여 다시금 가덕 등지의 섬들을 탐색했었으나, 끝내 적의 종적이 없었으므로 곧 군사를 돌이켜 본영으로 돌아 왔습니다, 가덕 서쪽에서 마음대로 출입하던 적들은 이미 많은 배들을 잃게 되었으며, 또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산으로 도망하여 잡히지 않았던 적들은 필시 부산 등지로 도주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자세하게 말하였을 것이므로 이후부터는 뒷 일을 염려하고 꺼리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전후 적을 토멸할 때, 남해 동쪽의 웅천 등 7.8개 고을에서는 남녀노소의 피난민들이 산곡에 잠복하여 신들이 적선을 추격하는 것을 바라보고서 다시 살아날 길을 얻은 것 같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내려와서 적의 행방을 말해주면서 상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몹시 비참하고 불쌍하여 왜선에서 얻은 쌀과 포목 등의 물건을 고루 나누어 주고 편히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귀화인과 보자기들은 가족을 데리고 그들의 이웃 친척과 함께 스스로 본영의 성내로 들어오는 자가 연이어 끊이지 않는데, 지금까지 들어온 수가 거의 200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제각기 제 직업에 부지런하게 하여 오래도록 편안히 살도록 하기 위하여 본영에서 가까운 장생포 등 땅이 넓고 기름지고 인가도 많은 곳에 나누어 들여 편안히 지나게 하였습니다.

왜선에 포로된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내어 생환하게 하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왜선을 불사를 때에는 각별히 찾아서 구해내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번에 여러 장수들이 위의 지시에 따라 포로되었던 남녀 6명을 산채로 잡아내었습니다.

이들 중에 다른 사람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포로된 날자가 짧아서 적의 소행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항포 바깥 바다에서 녹도 만호 정 운이 사로잡아 온 동래 사는 사갓집종 억만은 금년에 나이 13세로서 머리를 깍아 왜인같이 되었는데, 심문한 바 답하는 내용에,『동래 동문 밖 연지동에 사는 사람으로서 난리가 일어난 즉시 부모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날짜는 기억할수 없으나, 4월 경에 왜적이 무수히 몰려들어 성을 다섯겹으로 포위하고 남은 적들은 들판에 흩어져있었는데 맨 앞장을 선 적은 갑옷을 입고 제각기 큰「지을개:탈바가지」를 갖고 있었으며, 「광대투구」를 쓴 놈 100여명이 돌입하여 성을 깨뜨리면서 한편으로는 대나무 사닥다리를 옆으로 세우고 곳곳에서 넘고 넘었으며, 이미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자, 살벌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소인은 허둥지둥 당황하는 사이에 부모와 형을 잃어버리고 갈 곳을 알지 못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부르짖으며 울고 있을 때, 한 왜놈이 손을 붙들고 강제로 끌고서 바로 부산에 이르러 5,6일 머무른 뒤에 그 배로 옮겨 실었습니다.

배안에서는 왜놈 7,8명이 있다가 나를 보고 떠들썩하게 부르며 칼을 휘둘러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를 끌고 갔던 왜놈이 팔을 벌려 막아 주고서는 배 밑창에 숨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머무르고 있는 왜선은 원래의 척수가 몇 척인지 알 수 없거니와 배에 실린지 5,6일이 지난 뒤에 대선 30여척이 동시에 따라서 우도로 향하였는데, 그중의 층각선에는 장수가 거처함인지 여러 배들이 그 아래로 운집하여 명령을 듣는 것 같았으며, 어떤 때에는 2,3척씩 패를 나누어 도적질을 하면서 여염집을 분탕하고, 칼로서 우마를 해치고 포목과 곡식 및 잡물을 배에 실었는데 이렇게 하기를 어떤 날은 두 세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온 섬이나 마을들의 이름은 어느 곳인지를 알지 못하며 이번 6월 5일 4척이 한패가 되어 진해 선창으로 함께 가서 반수 가량은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얼마되지 않아서 진해성 밖에서 수천명의 무장병들이 그 고을로 돌입하여 형세가 드높자, 성안으로 들어갔던 왜적들이 크게 소리쳐 부르짖으며 급히 돌아와서 배를 타고 노를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 피하였습니다.

또 보니 바람에 펄럭이는 돛을 단 큰 전선들이 서쪽 바다를 가로 막고 있었으므로 왜적들은 스스로 종적을 감추지 못할 것을 알고 입술이 타서 목이 마르고 기운이 다꺽여 큰 배를 버린 채 작은 배에 탑승하여 멀지 않는 포구로 노를 저어 재촉하여 도망해 들어갔습니다.

소인과 어제 포로된 자로서 진해에 사는 절종 나 근내 등을 큰 배에 함께 버려 두었기 때문에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왜인들은 제각기 활,칼 및 철환을 가졌고, 조석으로 먹는 밥에는 반이나 모래와 흙이 섞여 있었으며, 다른 일을 말이 서로 달라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 라고 진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율포 앞 바다에서 접전할 때 녹도 만호 전운이 사로잡아 온 천성수군 정달망은 나이 이제 14세로서 심문한 바 답하는 내용에, 『사변이 일어난 뒤, 부모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는데, 배가 고프고 피곤하여 날짜를 기억할수 없으나 6월 초생쯤 천성에서 가까운 들판 보리밭에서 이삭을 주워 연명하려고 내려왔다가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날 왜인들은 영등포 근처의 기슭에다 배를 대고 그들이 약탈한 물건을 햇볕에 말리며 바람을 쏘이고 있을 때, 우리 나라 수군이 불의에 돌격하였습니다.

왜인들은 엎어지고 넘어지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곧 닻줄이 끊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배를 타고 멀리 바깥바다로 도망치다가 힘이 다하여 붙잡혔습니다.

』 라고 지난 일을 모두 진술하는 것이었으므로 윗 사람들은 다 어린 나이에 왜적에게 포로되어 친척과 고향을 떠나 보기 불쌍하고 가엾어 각각 잡아온 관원에게 <잘 보살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가 사변이 평정된 뒤에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각별히 타일렀습니다.

왜선을 격파한 총수는 72척이며 왜의 머리가 88급입니다.

적의 머리는 왼쪽 귀를 베어서 소금에 저려 궤속에 넣어 올려 보냅니다.

그런데, 신이 당초 약속할 때 여러 장수를 군사들에게, 『공로와 이익을 탐내어 서로 다투어 먼저 적의 머리를 배려하다가는 도리어 해를 입어 사상자가 많아지는 정예가 있으므로 사살한 뒤에 비록 목을 베지 못하더라도 힘써 싸운 자를 제일의 공로자로 정하겠다.

』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기 때문에 무릇 네 번이나 접전할 때,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이 매우 많았으나, 머리를 베인 것은 많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 균은 접전한 다음 날 협선을 보내어 왜적의 시체를 거의다 거두어 목을 베엇을 뿐 아니라, 경상도 연해안의 보자기들이 화살에 맞아 죽은 왜적의 머리를 많이 베어서 신에게 갖고 왔지만, 신은 타도의 대장으로서 그것을 받는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아서 원균에게 갖다 바치라고 타일러 보냈습니다.

원균과 이 억기등 여러 장수들이 적의 목을 벤 것이 거의 200급이나 되며 혹은 바다 가운데로 떠내려가고 혹은 목 벤 것을 물에 빠뜨린 것도 그 수가 많았습니다.

왜적의 물품중에 왜인의 의복 이외에 미곡,포목등 물품의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혹은 군사들의 식량으로 보충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적의 군용물품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뽑아내어 별지에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우후 이몽구가 찾아낸 왜장은 부하인 칠갑에 들어 있던 금부채와 방답첨사 이순신이 찾아서 보내 온 왜장의「분군전기」6축도 아울러 봉함하여 올려 보냅니다.

접전할 때, 사졸로서 화살이나 철환을 맞은 사람 중에는 신이 타고 있는 배의 정병 김말산. 우후선의 방포 진무 장언기. 순천 1호선의 사부이며 사삿집 종인 배 귀실.순천 2호선의 사부이며 관청의 종인 기이. 홍양1호선의 전장이며 관청의 종인 난성.사도 1호선의 사부이며 진무인 장희달. 여도선의 사공이며 토병인 박 고산과 격군 박 궁산 등은 철환을 맞아 죽었으며, 홍양 1호선의 사부이며 목동인 손장수는 뭍으로 올라간 왜적을 추격하여 목을 베려할 때, 칼에 맞아 죽었으며, 순천 1호선의 사부이며 보인인 박훈. 사도 1호선의 사부이며 진무인 김종해 등은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순천 1호선의 사부인 유귀희. 광양선의 격군이며 보자기인 남산수.홍양선의 선장이 수군인 박백세와 격군이며 보자기인 문세. 훈도이며 정병인 진춘일.사부이며 전엽인 김복수.내노인 고붕새.낙안 통선의 사부 조천군과 수군 선진근.무상이며 사삿집종인 세손.발포1호선의 사부이며 수군인 박장춘과 토병 장업동.방포수군 우성복등은 철환을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 는 않았으며, 방답첨사의 종언용과 광양선의 방포장 서 천용 및 사부 백 내은손. 흥양선의 사부이며 정병인 배 대검과 격군이며 보자기의 말손. 낙안 통선의 장흥조방 고희성. 능성조방 최난세. 보성 1호선의 군관 김익수와 사부 오언용 및 무상이며 보자기의 혼손.사도 1선의 군관 진무성과 임흥남 및 사부이며 수군인 김억수와 진언양. 신선인 허복남. 조방전 광예 방포장 허원종. 토병 정어금. 여도선의 사부 서건개. 유수.선유석 등은 화살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위의 사람들은 시석을 무릅쓰고 결 적으로 돌진하다가 혹은 죽고 혹은 상한 것이 었으므로 죽은 사람의 시체는 각기 그 장수에게 명하여 별도로 작은 배에 실어서 고향으로 보내어 장사지내게 하였는데 그들의 처자들은 휼전에 의하면 돌보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중상에 이르지 아니한 사람들은 약물을 지급하여 충분히 치료하도록 하라고 각별히 신칙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에게는, 『한번 승첩했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군사를 위무하고 전선을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급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되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라고 엄하게 신칙하고 진을 파하였습니다.

중위장 권준. 전부장 이순신. 중부장어영담. 후부장 배흥립. 좌부장 신호. 우부장 김 득광. 좌척후장 정운. 우척후장 김완. 구선 돌격장 급제 이기남, 신의 군관 이언량. 좌별도장 이몽구. 우별도장 임인영. 한후장이며 신의 군관인 전 권관 고 안책과 대솔 군관인 봉사 변존서. 나대용. 전봉사 송희립(宋希立) (임진 3. 26) 자는 신중(信仲). 여산(礪山) 사람. 증참판(贈參判) 송관(宋寬)의 아들. 1592년(임진)에 지도만호(智島萬戶)로서 형 대립(大立, 參議), 아우 여립(汝立, 主簿)과 함께 세 형제가 이순시의 부하가 되었다. 그 때 홀어머님이 계셨건만 “집안 일보다 나라일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 하며 나서게 됐다. 처음 출전하게 될 때 모든 장수들 중에 특히 이사람과 여도만호 정운(鄭運) 등이 출전을 주장한 의인들이었다. 7년전쟁 동안 이순신과 함께 시종을 같이 했으며, 마지막 노량・관음포 전투에서 도독 진린(陳隣)이 적에게 포위되자 달려가 구하다가 자기도 탄환에 맞아 넘어졌다.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외치자 그는 다시 일어나 상처를 붙들고 계속 싸웠다. 이순신이 마지막 적탄에 맞았을 때 『호남동순록』에는 “송희립이 북채를 받아 쳤다”고 적혀 있다. 뒤에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사후 승주 충무사(忠武祠)에 배향되었다.
. 이설. 신영해. 급제 김효성. 배응록. 정로위. 이봉수 등은 분연히 제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역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관원과 군사들도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돌진한 사람들은 공로의 대소를 논의하여 포장하는 일을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 뒤에 결정하려면 왕복하는 동안에 시일이 늦어지고, 더구나 행재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길이 막혀 사람이 통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강력한 적을 물리치지 못한 채, 상을 주어야 할 시기를 넘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의 심정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당면한 일에 힘쓰도록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2,3등으로 나누어 별지에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당초 약속할 때 비록 목을 베지 못해도 죽음으로써 역전한 자에게 제1의 공로자로 정한다고 하였으므로 힘써 싸운 여러 사람들은 신이 직접 등급을 결정하되 1등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삼가 아외옵니다.


 
[제 1차 옥포 승첩을 아뢰는 계본 1592년..
[제 3차 한산도 승첩을 아뢰는 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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